반응형 까르띠에 역사3 (4) 리치몬트 그룹의 대장 브랜드, 까르띠에 ◎ 가족경영체제의 막을 내리다 '까르띠에 프레르'는 1921년. '까르띠에 S.A.(Cartier S.A.)'로 또 한 번 상호가 바뀌었습니다. 이전 상호에 들어간 ‘형제’라는 의미의 ‘프레르’가 후대 경영자들이 사용할 회사명으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요. 21년 후인 1942년, 세 명의 3대 경영자들 중 첫째와 셋째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와 자크 떼오뒬 까르띠에가 세상을 떠나면서 까르띠에 S.A.는 자연스럽게 4세 경영인 체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4대째에 접어들면서 까르띠에 S.A. 의 지분은 까르띠에 가문 밖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1962년 미국법인이 먼저 날아갔고, 1966년에는 본사인 프랑스법인마저 외부 투자자들에게 넘어가 1960년대에 까르띠에 가문이 운영하는 까르띠.. 2020. 4. 9. (3) 까르띠에 최초 현대식 시계 및 비운의 여인 잔느 투생 ◎ 최초의 현대식 손목시계 개발 장자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그의 성격은 '까르띠에 프레르'가 보석 외에 시계 사업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특히 그는 최초의 현대식 손목시계로 꼽히는 산토스 뒤몽(Santos-Dumont)을 개발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Santos-Dumont은 까르띠에 프레르가 만든 첫 시계는 아니었습니다. 까르띠에는 이전에도 시계를 만들긴 했지만, 이들은 시계라기보단 보석 세공을 위한 바탕 장신구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금팔찌 귀퉁이에 시계가 붙어 있는 식이었는데, 때문에 시계 업계에서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에겐 알베르토 산토스-뒤몽 (Alberto Santos-Dumont)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 2020. 4. 5. (2) 세계로 뻗어 나가는 '까르띠에' ◎ 세계로 뻗어 나가는 까르띠에 1874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55세의 나이로 은퇴하면서 그의 아들인 '알프레드 까르띠에(Alfred Cartier)'가 메종 까르띠에를 이어받았습니다.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보석 세공사 일을 익히긴 했지만 이를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보석 세공과 경영을 겸하는 대신 전문경영인에 더 가까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이끄는 메종 까르띠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해나갔는데요.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경영을 맡은 이후 메종 까르띠에는 낱개 점포를 벗어나 기업 수준으로 외형을 크게 확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890년대 후반 프랑스 시장의 한계를 느낀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해외시장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 왼쪽부터 자크 떼오뒬 .. 2020. 4. 4.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