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보석 찾기(브랜드 이야기)

(2) 세계로 뻗어 나가는 '까르띠에'

jewel case 2020. 4. 4. 10:10
반응형


◎ 세계로 뻗어 나가는 까르띠에

1874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55세의 나이로 은퇴하면서 

그의 아들인 '알프레드 까르띠에(Alfred Cartier)'가 

메종 까르띠에를 이어받았습니다.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보석 세공사 일을 익히긴 했지만

이를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보석 세공과 경영을 겸하는 대신

전문경영인에 더 가까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라 빼 거리(Rue De La Paix)' 13번지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이끄는 메종 까르띠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해나갔는데요.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경영을 맡은 이후

메종 까르띠에는 낱개 점포를 벗어나 기업 수준으로 외형을 크게 확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890년대 후반 프랑스 시장의 한계를 느낀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해외시장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알프레드 까르띠에(2대 경영자)와 그의 세 아들들

↑↑↑ 왼쪽부터 자크 떼오뒬 까르띠에, 알프레드 까르띠에, 피에르 까미유 까르띠에,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

 

그는 해외사업을 맡기기 위해 세 아들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Louis Joseph Cartier), 

피에르 까미유 까르띠에(Pierre Camille Cartier), 

자크 떼오뒬 까르띠에(Jacques Th′eodule Cartier)를 경영에 참여시켰는데요.

 

1899년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파리 고급 패션의 메카인

'라 빼 거리(Rue De La Paix)' 13번지로 이전하고,

메종 까르띠에의 상호를 ‘알프레드 까르띠에 엔 필스(Alfred Cartier & Fils)’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알프레드 까르띠에와 아들들’이란 뜻입니다.

세 형제는 1900년대 후반까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해외 지사를 세웠는데 

이후 경영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첫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가 파리 본사를, 

둘째 피에르 까미유 까르띠에가 미국을 총괄하는 뉴욕 지사를, 

셋째 자끄 떼오뒬 까르띠에가 영국을 총괄하는 런던 지사를 맡았다. 

 

세 형제가 경영의 주축이 되면서 알프레드 까르띠에 엔 필스 상호도 

1906년 ‘까르띠에 프레르(Cartier fr′eres)’로 변경됐습니다.

‘까르띠에 형제들’이라는 뜻입니다.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왕의 보석상, 보석상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은 까르띠에는 

이 3대를 거치면서 세계 최고의 보석상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까르띠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