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석 세공사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 '까르띠에'의 시작
까르띠에의 역사는 1819년 프랑스 파리의 화약공(火藥工) 집안에서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Louis Francois Cartier)가 태어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상류층에게 화려함의 상징이었습니다.
호화로운 파티와 사교계, 염문설 등은 당시 파리 상류층의 분위기를 잘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화약공 대신 보석 세공사 직업을 선택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보석세공사는 가장 유망한 직종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0대 중반이 되었을 무렵 파리의 유능한 보석 세공사
아돌프 피카르(Adolphe Picard)의 아틀리에에 견습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견습공일 때에도 그에게 맞춤 제작을 의뢰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타고난 장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28살이 되던 1846년, 자신만의 장인(匠人) 마크를 만들어 프랑스 상업등기소에 등록했습니다.
요즘 말로 치자면 디자이너 브랜드를 론칭한 셈인데요.
때문에 일부에선 까르띠에의 시작을 1846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트와 마름모꼴로 둘러 싸인 그의 이니셜 L과 C를 장인 마크로 등록)
1847년 아돌프 피카르가 작고한 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스승으로부터
파리 몽토르게이 29번지에 있는 보석 아틀리에를 물려받게 됩니다.
같은 해 그는 아틀리에의 이름을 ‘메종 까르띠에(Maison Cartier)’로 바꿨는데
까르띠에에선 이때를 브랜드 창립의 원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까르띠에 하우스의 탄생, 173년 역사를 지닌 전설적인 브랜드의 시작!
당시 프랑스 상류층에선 호화로운 치장이 유행했기 때문에
메종 까르띠에는 엄청난 호황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1856년 파리 사교계의 여왕이자 패셔니스타였던
마틸드(Mathilde) 공주가 방문하면서 메종 까르띠에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고 합니다.
마틸드 공주는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의
보석 세공품에 푹 빠져 첫 방문 이후, 메종 까르띠에의 충성 고객이 되었습니다.
마틸드 공주는 메종 까르띠에의 주요 고객이기도 했지만
홍보 대사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메종 까르띠에는 마틸드 공주 덕분에 해외 유력인사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됐고,
1850년대 말에는 공주의 추천으로 프랑스 왕실의 보석 세공사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